기후와 작물, 사회
Contents/책
2008/07/22 23:58
이런 기후 조건은 북유럽 거의 전체가 비슷했지만 아일랜드는 습도가 높은 것이 감자에 특히 적합했다. (...) 요리하기도 쉽고 저장도 쉬워서 감자는 아일랜드 빈곤층에게는 안성맞춤인 식품이었다. 이래서 감자는 자연스럽게 효과적인 구황식품으로 등장했다. 감자와 곡물의 조합은 곡물 농사가 흉작이 되더라도 안전판이 되었다. 감자와 곡물 간의 균형이 유지되는 한 아일랜드는 굶주림에 대한 사회 안전망을 구축한 셈이었다.
- 브라이언 페이건, "기후는 역사를 어떻게 만들었는가", 2000, p. 297
아일랜드의 감자 재배는 그 뒤 반세기 동안 20배로 늘어났다. 물론 '학살의 해(Blaidhain an air)'라고 불리게 된 1740~1741년은 예외였다. 그 해에 유례 없는 혹한이 몰려와 곡물과 감자 그리고 가축, 심지어는 바닷새들까지 얼어죽었다. (...) 30 내지 40만 명이 이질, 굶주림, 티푸스로 인해 죽었다. 결국 아일랜드인의 10퍼센트 정도가 1740~1741년 당시의 기근과 그에 따른 질병으로 죽은 것이다. 이 때의 기근은 감자도 귀리도 아일랜드 농업의 완벽한 해결책은 되지 못한다는 것을 증명한 셈이다. 큰 문제 가운데 하나는 비가 잦은 기후에서는 감자의 저장 기간이 최장 8개월을 넘기기 어렵다는 사실이었다.
- 브라이언 페이건, 앞의 책, pp. 298~299
날씨 때문에 생길 수 있는 잠재적인 위험성을 망각한 채 아일랜드는 단품종 경작이라는 위험천만한 농업으로 옮아갔다. (...) 감자의 공급에 차질이 절대로 없을 것이라는 환상을 갖게 된 영국은 본토 북동부의 리버풀과 맨체스터 지방의 급격한 산업화로 늘어난 인구를 먹이기 위해 아일랜드의 감자를 수입했다.
- 브라이언 페이건, 앞의 책, p. 300 감자는 식량 부족에 대한 충분한 보험이 아니었다. '여름이 없던 해'인 1816년에 6만 5천명이 굶주림과 그에 연관된 병으로 죽었다. 그들이 죽은 부분적인 원인은 영국 당국자가 과거처럼 곡물 수출을 금지하지 않은 데 있다. 총무대신 로버트 필은 국가가 기근 구제에 중심적 역할을 하고 나서면 개인 자선가들이 구휼 노력을 기울이지 않을 것이므로 국가가 적극성을 띠지 않겠다고 억지 핑계를 댔다. 1817년 6월 그는, "생활 수준이 높은 자들은 가족 식탁에 감자를 올리지 말 것이며 말에게 먹이는 귀리의 양을 줄이라"는 얼빠진 지침을 내렸다.
- 브라이언 페이건, 앞의 책, p. 303
로버트 필은 아일랜드 통치에 상당한 경험을 가지고 있었고, 아일랜드의 문제들은 사회적 후진성에 기인한다고 확신했다. 그는 미국에서 값싸게 들여오는 옥수수로 아일랜드의 식생활에서 감자를 영원히 대체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또 시골의 빈민들을 부농의 땅에서 일하고 품삯을 받는 임금노동자로 만들려 했다. 그는, 자유무역이 이루어지고 고도의 과학적 농업에 점점 더 많은 투자를 하여 사회가 재조직되기만 하면 아일랜드의 농업생산량이 비약적으로 올라갈 것이라고 확신했다.
- 피터 그레이, "아일랜드 대기근", 1995, p. 39
1845년 아일랜드 전체의 감자 손실률은 약 40퍼센트, 그러니 기근의 위협은 즉각적으로 나타났다. (...) 위원회는 원인 규명에는 실패했지만 필에게 미국으로부터 10만 파운드 상당의 옥수수를 즉시 수입하라고 건의했다. 그러나 필은 굶어 죽어가는 감자 농민을 구제하기 위한 식량으로서가 아니라 정부가 곡물 시장에 관여한다는 비난을 받으면서 곡물 가격을 낮게 유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 조치를 취했다. (...)
1846년 4월, 하원은 농부들이 씨감자를 먹어치우고 있음을 알았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 8월 초에 들어서자 동고병이 작년보다 딱 두 달 앞서서 다시 찾아왔다. (...)
1846년은 흉작으로 인해 전 유럽이 식량 부족에 빠진 해였다. 그래서 각국은 지중해와 북아메리카로부터 수입하는 식량 화물을 서로 차지하려고 다투었다. 프랑스와 벨기에는 높은 값을 치르고 대부분의 식량을 차지했다. 영국은 여기서 밀려나고 따라서 아일랜드의 기아 구제에 차질이 생겼다. (...) 그러면서 정부는 굶주리는 그 지방에서 곡식이 반출되는 것을 금지하지도 않았다. (...) 10월이 되자 날씨가 추워졌다. 11월에는 타이론 지방에 15센티미터의 눈이 니렸다. (...) 그해 11월, 28만 5천 명이 보잘 것 없는 품삯을 받고 구제기관이 실시하는 근로사업에 나갔다. 많은 수가 일하다 죽었다. (...)
빛나는 여름과 병 없는 수확에도 불구하고 기근은 1847년에도 계속되었다. (...) 1848년 (...) 7월 들어 냉랭해지면서 비가 자주 내렸다. 그러자 어느 날 하룻밤 사이에 동고병이 발생했다. 8월이 되자 비가 더 많이 내려 밀과 귀리 농사를 망치는 새로운 재앙이 추가되었다. 1848년의 감자 흉작은 처참했던 1846년에 필적했다. (...)
1846년 4월, 하원은 농부들이 씨감자를 먹어치우고 있음을 알았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 8월 초에 들어서자 동고병이 작년보다 딱 두 달 앞서서 다시 찾아왔다. (...)
1846년은 흉작으로 인해 전 유럽이 식량 부족에 빠진 해였다. 그래서 각국은 지중해와 북아메리카로부터 수입하는 식량 화물을 서로 차지하려고 다투었다. 프랑스와 벨기에는 높은 값을 치르고 대부분의 식량을 차지했다. 영국은 여기서 밀려나고 따라서 아일랜드의 기아 구제에 차질이 생겼다. (...) 그러면서 정부는 굶주리는 그 지방에서 곡식이 반출되는 것을 금지하지도 않았다. (...) 10월이 되자 날씨가 추워졌다. 11월에는 타이론 지방에 15센티미터의 눈이 니렸다. (...) 그해 11월, 28만 5천 명이 보잘 것 없는 품삯을 받고 구제기관이 실시하는 근로사업에 나갔다. 많은 수가 일하다 죽었다. (...)
빛나는 여름과 병 없는 수확에도 불구하고 기근은 1847년에도 계속되었다. (...) 1848년 (...) 7월 들어 냉랭해지면서 비가 자주 내렸다. 그러자 어느 날 하룻밤 사이에 동고병이 발생했다. 8월이 되자 비가 더 많이 내려 밀과 귀리 농사를 망치는 새로운 재앙이 추가되었다. 1848년의 감자 흉작은 처참했던 1846년에 필적했다. (...)
- 브라이언 페이건, 앞의 책, pp. 307~316
"거대한 이민의 물결이 끊임없이 서쪽으로 이어지고 있다. 대다수 이민자들은 아일랜드의 농민과 날품팔이 인부들로, 신대륙에서 운명을 개척하고자 구대륙을 떠난 다섯 사람 중 최소한 네 명이 아일랜드계로 추산된다. 감자 기근과 콜레레가 만연하여 비참한 나날이 이어졌고 아일랜드계 이민자의 수는 갈수록 늘고 있다. 그 숫자가 너무나 엄청나 아일랜드 인구의 점진적 감소가 있지 않을까 하는 우려를 불러일으킬 정도이며, 그런 예상은 거의 확실시되고 있다." 《디 일러스트레이티드 런던 뉴스》, 1850년 7월 6일
- 피터 그레이, 앞의 책
이 대기근으로 인한 사망자 수는 영원히 알 수 없을 것이다. (...) 극도로 예측 불능했던 기후와 단일 작물에 지나치게 의존한 점과 정부 차원의 무관심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 유럽의 한 귀퉁이 고립된 섬에서 적어도 1백만이 넘는 인구가 죽었다. (...)
아일랜드의 인구는 나머지 19세기 기간 동안 줄곧 줄어들었다. 이민은 1854년에 최고조에 달했다. 1860년대에도 매년 9만 명 꼴로 이민을 떠났다. 이것은 1870년대 와서 이탈리아 이민이 급증하기까지 유럽 어느 나라보다 높은 이민자 수였다. 1900년에 이르자 아일랜드의 인구는 대기근 이전의 절반 수준으로 떨어졌다. 이는 유럽 여러 나라 중 아일랜드에만 있었던 독특한 현상이다. 아일랜드의 인구 감소 추세는 1960년대에 와서야 겨우 반전되었다. (...)
아일랜드의 대기근은 유럽의 마지막 기근이 아니었다. (...) 그러나 수치스럽기로는 아일랜드의 기근을 따를 기근이 없다.
아일랜드의 인구는 나머지 19세기 기간 동안 줄곧 줄어들었다. 이민은 1854년에 최고조에 달했다. 1860년대에도 매년 9만 명 꼴로 이민을 떠났다. 이것은 1870년대 와서 이탈리아 이민이 급증하기까지 유럽 어느 나라보다 높은 이민자 수였다. 1900년에 이르자 아일랜드의 인구는 대기근 이전의 절반 수준으로 떨어졌다. 이는 유럽 여러 나라 중 아일랜드에만 있었던 독특한 현상이다. 아일랜드의 인구 감소 추세는 1960년대에 와서야 겨우 반전되었다. (...)
아일랜드의 대기근은 유럽의 마지막 기근이 아니었다. (...) 그러나 수치스럽기로는 아일랜드의 기근을 따를 기근이 없다.
- 브라이언 페이건, 앞의 책, pp. 315~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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